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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첫날처럼



홍대 골목에 자그마한 카페를 마련했다고 G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는 가보겠다고 답을 보냈다. 며칠 뒤 그는 언제 올 거냐고 문자를 보냈다. 조만간,이라고 답했다. 또 며칠 지나 J가 내게 새로운 친구들을 소개시켜 준다고 나오라 했다. 그녀의 국민학교 동창들인데, 너는 내 친구들이랑 놀아봐야 해! 라고 J는 말했다. 홍대 근처에서 보기로 하고 S에게도 연락했다. 오후 4시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전철역 출구에서 할아버지가 팔고 있는 꽃무더기를 발견하고 무슨 꽃을 사야할지 망설였다. 흰 장미 한 다발을 샀는데, G가 좋아할지 잘 모르겠어서 가을 소국도 한 다발 달라고 했다. 꽃다발 두 개를 안고 카페가 있다는 골목을 찾아가다 또 꽃가게를 발견했다. 아, 꽃다발보다는 화분이어야 했을까? 나는 어쩐지 자신이 없어져 꽃집에 들어가 작은 넝쿨화분을 또 샀다. 출입문에 들어섰을 때 G와 눈이 마주쳤다. 어서 와, 오랜만이야. 응, 진짜 오랜만이네. 그는 주방 카운터 뒤에서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꽃다발과 화분을 빈 테이블에 주섬주섬 내려놓았다. 아직 영업 시작 전이라 음악도 없고, 오픈한 지 얼마 안되어 몇 군데가 덜 정리돼 있었다. 내가 아무 테이블에나 앉자 그는 커피 메뉴를 보여주면서 뭘 만들어줄까? 했다. 나는 메뉴를 잠시 보다가 네가 아무 거나 골라서, 라고 했다. 그는 에이, 재미없게. 라고 했지만 그냥 알아서 커피를 내려주었다. 나는 커피를 별로 즐기지 않고 브랜드도 잘 모른다. 그래서 그 카페의 커피가 맛있는 것인지 품평해줄 수가 없었지만 그냥 맛있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바빴다. 가게 벽에 못을 몇 개 더 박아야 했고, 그래서 전동 드릴 굉음이 잠시 울리기도 했다. 주방 선반 하나를 고정시켜야 했고 또 무언가를 했고...... G는 단 30초도 테이블 내 앞에 마주앉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고마웠다. 우리가 말한 '오랜만이네'는 말 그대로였다. 4년만인가. 3년만인가. 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싸운 거나 마찬가지였었다. 다시는 안 본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언제 다시 볼지는 알 수 없는 그런 마음들이었다. 몇 해 전까진 가끔 서로의 블로그를 흔적없이 방문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것도 한참 전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색했다. 그런데 어색했는데, 괜찮았다. 2년 전인가 깐느에 갔다가 우연히 마셔보고 이 커피다! 생각해서 이 카페의 커피로 정했다고 G는 가게 안을 오가는 중에 말했다. 색색깔의 작은 캡슐에 담긴 커피마다 맛과 강도가 다르다고 했다. 써버린 커피 캡슐을 유리병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으니 구슬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잘 지냈냐고 서로 물었다. 건강은 어때? 하니, 뭐 보건증은 나왔으니까, 한다. 먹는 메뉴가 있는 가게 허가를 받으려면 점주가 건강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걸 새삼 떠올렸다. 피부병은 없는지, 전염되는 질환의 보균자는 아닌지. 그렇겠군, 하고 우리는 지나가듯 웃었다.

문득 그가 음악을 틀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타임. G는 카페 바닥을 밀대로 닦고 나는 테이블에 놓인 몇 권의 책들을 넘겨보았다. 벽엔 그가 찍은 사진들이 작은 액자들로 걸려 있었다. 그가 화분에 물을 주면서 또 물었다. 요즘 뭐해?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지지부진한 나날들에 관해. 겨울에 책 나올 거야, 라고 겨우 말한다. 말해놓고는 꼭 거짓말을 한 것 같아진다. 그래서 덧붙이듯 말한다. 있잖아, 전에 쓴 책. 지나치게 많이 팔렸어. 그가 고개를 든다. 그 책이 여태 팔리나? 얼마나 팔렸는데. 내가 대답하니 그는 뭐어? 깜짝 놀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이야, 어떻게 그래? 나도 그러게, 한다. 그 책의 주인공 이름과 G의 이름은 같다. G에게서 빌려온 이름. 우리는 5년 전 그 책이 나왔을 때 2년쯤은 팔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더 많이 팔리는 책들도 많고, 백만 부가 팔리는 책들도 있지만, 내게 혹은 한시절 같이 보냈던 우리들에게 그 책은 너무나, 너무나 많이 팔린 것이었다. J와 S와 G와 나. 우리들 농담과 진담이 발자국처럼 찍혀있는 그 이야기.

한 시간이 지났을 때 J가 도착했다. 야, 오랜만이다.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못 사왔어. 뭐 필요한 거 있음 말하든지. J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G는 내가 가져온 꽃다발을 가리켰다. 저 꽃을 꽂을 데가 없어. J와 나는 카페를 나와 아까 그 꽃가게로 걸어갔다. 혼자 놔둬서 미안해. 어땠어? J가 물었다. 응, 더할나위 없었지. 쟤는 내 앞에 단 10초도 마주앉지 않았어. 꽃병을 손에 들고 J가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J는 커피 메뉴의 정성어린 소개글을 읽지도 않고 '파랑 캡슐'을 골랐고, G는 도대체 매너가 없다고 투덜댔다. 커피를 다 마시고 우리는 일어섰다. 뭐야, 여기서 술 마시는 거 아냐? 싫어, 더 편한 데서 마실 거야. J는 냉큼 카페를 나섰고 나는 다시 오게 되면 올게, 했다. 밥을 먹는데 S가 도착했다. 그리고 겨우 이십 분쯤 지났나. J의 국민학교 친구들이 근처에 오고 있다고 휴대폰이 왔다. S의 밥 먹는 속도가 조용히 빨라진다. 그는 갈 생각이다. 오늘은 맹이한테 내 친구들 소개해줄 거야. 넌 그냥 갈 거야? 수저를 내려놓고 S는 머뭇거렸다. 응, 미안... 아니야. 그래, 잘 가. S가 나가자마자 J의 친구들이 어깨를 스치듯이 들어왔다. 훤칠하고 경우 바르고 예쁜 사람들이었다. 낡은 노래가 나오는 곱창전골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혼자 낯선 사람인 나를 많이 배려해주었다.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화제를 올리지도 않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용인으로 오는 막차를 타야했기 때문에 나는 먼저 일어나서 택시를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종로통은 늦은 시각에도 여전히 차량이 많았고 많이 막혔다. 젊은 택시 기사는 요즘은 강남에서 강북으로 정치 경제권이 넘어온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나는 네? 했다. 건물의 임대료 추이를 봐도 그렇고, 택시 타는 손님들한테서도 피부로 느끼고, 아무튼 서울의 중심권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자기는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다. 그제서야 내가 서울에서 택시를 탄 것이 몇 년만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어쩌면 요령있게 대화하는 법을 다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사실은 몹시 울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G의 카페에 앉아 있었을 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우정이란 실은 없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우정이나, 혹은 돌이킬 방법을 모르겠는 우정이 있을 뿐. 요령없는 사람들이 참 오래도 친구로 지냈지만, 그래도 저 밑바닥의 첫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버스에서 S에게 문자를 넣었다. 잠깐이라도 얼굴 봤으니 됐다. 다시 볼 때까지 잘 지내. 답장이 온다. 응... 잘 들어가. 수원 톨게이트가 보일 때 J가 전화를 한다. 야, 내 친구들 데리고 카페에 다시 왔어. 사실은 아까 그 커피, 내가 여태 마셔본 커피 중에 제일 맛있었거든. 나는 잘했어, 라고 말한다. 커피 마니아에다, 속에 없는 소리는 못하는 J이니 그 커피는 정말로 맛있는 게 맞나 보다. 그리고 나는 J가 마지막 코스로 G의 가게로 다시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J니까. 다시 올 수 있으면 올게, 하는 나는 언제나 집으로 가지만.


카페에서 들었던 노래. 집에 와서 노랫말을 찾아본다. 만약 내가 세상을 조종할 수 있다면, 날마다 봄의 첫날처럼 아름다울 거라고. 봄의 첫날처럼. 봄볕이 있던 그 자리처럼.


If I ruled the world, ev'ry day would be the first day of spring
Every heart would have a new song to sing
And we'd sing of the joy every morning would bring

If I ruled the world, ev'ry man would be as free as a bird,
Ev'ry voice would be a voice to be heard
Take my word we would treasure each day that occurred
My world would be a beautiful place
Where we would weave such wonderful dreams
My world would wear a smile on its face
Like the man in the moon has when the moon beams


If I ruled the world by Buskers



by shadow lamp | 2009/09/17 18:46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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