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4월 17일
밭두렁에 쑥 캐러 언니 따라 갔더니
일요일에 파주 큰아주버니네 다녀왔다. 완이랑 동갑내기 사촌이 있어서 겸사겸사 놀게 해주려고 갔었는데, 점심을 먹고나자 '형님'이 (난 이 말이 지금도 입에 잘 안 붙는다. 차라리 언니,는 하겠는데. 이상해. orz) '동서야, 우리 밭두렁에 쑥 캐러 가자' 한다. 파주는 추운 편이라 아직 쑥도 많지 않을 텐데 굳이 과도며 소쿠리를 챙기는 걸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바람 부는 밭두렁에 앉아 따문따문한 쑥을 뜯고 있는데 아니다 다를까, 그녀는 피식 웃더니 하소연을 한다.
"영진 아빠가 나 태권도장 다니는 거에 신경 쓰는 거 있지. 못 다니게 할까 봐 조마조마했어."
"왜요?"
"아니, 지난번에 길에서 태권도 관장님을 만났거든. 이 동네 남자들 중에 제일 잘 생기고, 운동을 하다보니 몸매도 권상우야. 나랑 웃으면서 인사 했더니 영진아빠가 눈에 힘이 딱 들어가더라구."
"저런. 하하하."
웃기는 했지만 만약 형님이 태권도를 못 다니게 되면 큰일이다. 왜냐하면 올해 마흔세 살인 그녀는 활달한 성격에 운동을 좋아해서, 꾸준히 동네 도장에 다닌 끝에 얼마 전 검은띠를 땄으며, 무슨 경기도 태권도 대회 같은 곳에 나가 '주부' 부문 메달도 받은 열혈 태권소녀였으니.
문제는, 이렇게 활달한 그녀보다 다섯 배는 더 활달하고 기가 센 아주버니. 내가 그들 부부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친구 J는 '보니와 클라이드 커플'이라고 하는데, 보니가 아무리 카리스마 있어도 클라이드의 카리스마가 몇 배나 강할 때는 밀릴 수밖에 없는 거다.
큰아주버니로 말할 것 같으면 20대를 '무학권'을 단련하는 데 보냈으며, 손바닥 장풍으로 촛불을 껐고 한때 TV에도 출연해 묘기를 선보인 '무술인'이었다. 그 넘치는 기와 에너지가 아직도 이어져,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면 맨 앞에 나가
그러니 지금이야 운동을 그만둔지 오래이고 사업 하느라 바빠 몸 관리도 잘 못하지만, 자기 아내가 (꼴랑) 동네 태권도 관장을 존경하면서 그로부터 열심히 운동을 배우는 게 어쩐지 심통나는 것이다. '자세가 그게 뭐야? 거 제대로 가르치는 거 맞아? 다리를 그렇게 뻗으면 어떡해!' 뭐 이런. 웃음.
하지만 보니에게도 묘수가 있었으니. 그녀는 얼마 전부터 남편 앞에서 태권도 관장의 흉을 슬쩍 슬쩍 보기 시작했단다. '폼이 영... 지난번 영진 아빠가 시범 보인 것보다 다리 찢는 자세가 별로 안 나오더라구.'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데? 남자 머리숱 없는 거 진짜 매력없는데.' 등등. 클라이드는 그만 마음이 풀려 다시 아내의 태권도 인생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잘됐네요." 하고선 쑥을 뜯고 있는데, 문득 그녀는 밭두렁에 쪼그리고 앉은 채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다. 들판에 부는 봄바람이 차가워 난 그만 들어가고 싶은데, 아- 진짜 이야기는 그때부터였다.
"동서야... 근데 형은 뭘 몰라."
"뭘요?"
"내가 허리가 아파서 얼마 전에 한의원에 갔었거든... 침 맞으려고 침상에 누웠는데, 내 티셔츠가 짧아서 배가 약간 나왔어. 근데 한의사가 조근조근 작은 목소리로 그러는 거야. 요즘 여자분들은 윗옷을 짧게 입고 다니시는데... 그러면 배가 차가워서 좋지 않습니다. 옷을 길게 따뜻하게 입으세요..."
"... ..."
"근데 그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근조근한 거야. 갑자기 눈물이 날라고 하는 거야. 이 사람 마누라는 맨날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살겠지. 나는 이때까지 부부간에 속삭인 적이 없었는데. 항상 사회자 마이크에다 대고 하는 말만 들었지."
그러더니 잠깐 눈물이 글썽하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 아아, 어떡하면 좋아요. 우리 보니와 클라이드. 태권소녀 보니는 관장님이 아닌 한의사님께 꽂혀 있는 걸요? 장풍으로 촛불을 끄면 뭘해요, 보니 마음을 알아 줘야지. 클라이드는 헛다리를 짚고 있네요. 태권도 관장님은 페인트 모션인 것을. 웃음.
그리하여 그녀를 위한 봄 노래.
뒷동산에 꽃 캐러 언니 따라 갔더니
솔가지에 걸리어 다홍치마 찢었읍네
누가 행여 볼까 하여 지름길로 왔더니
오늘 따라 새 베는 님이 지름길로 나왔읍네
뽕밭 옆에 김 안 매고 새 베러 나왔읍네
부끄러움 - 주요한 詩 이흥렬 曲
by 선명회합창단, 인천시립합창단

# by | 2006/04/17 13:36 | 불문곡직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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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겠습니다. 흠~^^;
'형님' 께서는 아직도 수줍은 소녀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