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loos | Log-in  


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


우리 동네 상가 1층에 꽤 아담한 공간이 있는데 입주하는 가게마다 번번이 문을 닫는다. 처음엔 작은 슈퍼마켓이었다가 이듬해 미술교습소가 되었다가, 뷰티숍이었다가, 아동복 매장이었다가 요즘엔 또 비어 있다. 그 앞을 오갈 때면 어지간히 불황이구나 싶기도 하고, 수익성은 없겠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바람으로 이러저러한 가게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를 테면 <금요일밤의 뜨개질 클럽> 같은 간판이 걸린다면 어떨까 싶은. 이건 케이트 제이콥스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뉴욕에 사는 조지아는 딸 하나를 키우면서 작은 수예점을 운영한다. 실과 바늘을 팔고, 수예점을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뜨개질법도 가르칠 겸 금요일 밤마다 가게에 모여 함께 뜨개질을 한다. 예상할 수 있듯이 소설은 인물이 저마다 안고 살아가는 크고 작은 사연들을 뜨개질처럼 풀어내고 짜 나간다. <조이럭 클럽>의 여인들이 마작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아메리칸 퀼트>에선 함께 퀼트이불을 만들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여기서는 그 소품이 대바늘과 뜨개실로 바뀌었을 뿐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물 군상의 사연은 단순히 인터뷰하듯 책상 앞에 앉아 나레이션처럼 읊어지지 않는다. 무언가 손에 들린 매개체, 소품과 함께 조심스럽게 실마리를 찾고 풀려나간다. 그리고 그 소품을 중심으로 인물들은 정기적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그들만의 '클럽'이 생기는 것이다. 클럽의 소품과 목적에 따라 모임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어서, 책을 매개로 하는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나 <제인 오스틴 북클럽> 같은 소설이 있는가 하면,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파이트 클럽>이나 <뒤마 클럽>, 또 아가사 크리스티의 <화요일 클럽의 살인> 같은 책도 빼놓을 수 없다. 이것도 빙산의 일각이고, 일일이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클럽'과 '무슨무슨 카페'를 이야기하는 소설들이 있지 않나. 여러 인물의 사연을 모자이크처럼 이야기하는 데는 그런 공간이 효과적인 게 사실이다. 일일이 등장인물을 따라 종횡무진하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한 자리에 모여 주니까. 구심점이 되는 호스트나 안주인이 교통정리를 해주고, 작품의 톤과 어울리는 적절한 소품이 배경을 완성시킨다.


누구나 한때는 아지트가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출근 도장 찍듯이 모였던 단골 카페나, 포용력 있는 누군가의 자취방, 몇 달 내내 외상장부를 달아놓고 돈 생기면 조금씩 갚았던 누군가들의 술집. 따지고 보면 그 아지트라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만의 공간도 아니었고, 찻값을 내야 머무를 수 있는 상업적인 장소이거나, 성격 좋은 (동시에 리더 취향인) 친구의 배려로 누릴 수 있었던 공간인 만큼 백프로 순수한 아지트라고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떤 거래도 헤게모니도 없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아지트라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소년들이 한밤에 숨어 들어갔던 숲속의 동굴 같은 곳 뿐일지도.) 하지만 어쨌거나 한시절 편안하고 친근하게 누렸던, 또는 방황하던 나날에 그 열정을 쏟아부었던 장소가 있었다면 그곳이 어디든 아지트라 불러도 틀리진 않으리라.

<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도 대도시 생활에 지친 여인들에게 털실처럼 폭신한 아지트가 되어준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도 독일군 점령 하에 힘든 생활을 보내는 마을 사람들이 우연한 계기로 독서를 매개 삼아 힘을 얻으며 위로해가는 이야기이고. 이런 류의 따뜻하고 잔잔한 책들에 등장하는 클럽은 등장인물간에 애정과 신뢰가 있어 읽기에 편안하지만, 책을 덮은 뒤 돌이켜보면 역시 사랑스런 판타지였음을 느끼게 한다. 소설 속 그들의 아지트는 마치 영원할 것같지만 당연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클럽도 그 구성원들의 충성도는 영원하지 않다. 의기투합의 정점을 찍고 나면, 그 후엔 분열과 이별이 따른다. 아지트를 공유했던 이들의 내리막길의 추억담은 애증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스티브 브래드쇼의 <카페 소사이어티>라는 책을 좋아했었다. 19세기 파리의 카페 풍경으로 시작해 여러 시인과 화가의 사연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그 시절 보헤미안 문화에 관한 책이었다. 그 속에 씌어진 이런 식의 구절이 좋았다.

한 편의 이야기로서 이 책은 동호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한 낙관주의와 더불어 시작하여 결국에는 테라스에 혼자일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회의로 끝나고 있다. 카페는 때에 따라 공동의 집, 광장, 비밀 결사들의 은거지, 성역, 아니면 개인 참호가 되기도 했는가 하면, 다른 경우에는 빈민굴, 매춘굴 또는 여인숙이었다. 물론 단순히 술 한잔이 생각나서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32p)

그러나 그 후 이 모든 공허한 모임들은 사라져 버렸다. (71p)


클럽을 결성하는 첫 마음은 공동 작업에 대한 '낙관'이다. 함께 모여서 이런저런 것들을 도모하고 의견을 나누고, 그들은 행복하게 교감한다. 그건 때로는 영혼의 친구를 만난 듯한 확신에 사로잡힐 만큼 기쁘고 짜릿한 나날이다. 아지트에 꽂히면 자신의 주된 주거 공간보다 그곳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 공간과 사랑에 빠진다. 구성원들 중엔 저마다 차이는 있지만, 유독 아지트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사람들이 있고, 나는 오래 전에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다. 내가 예전에 친구들과 틀어박혀 살았던 배나무 과수원 한가운데 집이 그러했고 그 집은 정말 마을 이름을 따오자면 '만가대 클럽' 같았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공동에 대한 낙관주의'가 의심스러워지고, 회의를 느끼는 날이 온다. 그래서 나는 저 책의 구절이 참 사무쳤었다. '이 모든 공허한 모임들은 사라져 버렸다.' 라고.

언젠가 찾아올 와해와 이별을 예상할 수 있음에도 아지트를 찾아가는 이유는, 서로가 알다시피 외롭기 때문. '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에 그들이 모여든 것은 다만 털실 뜨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 위로받기 위해서였지. 건지 아일랜드 사람들이 새삼 독서 클럽을 유지한 것도 그렇게 힘든 시절을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위로받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 카페 소사이어티의 사람들은 여전히 외롭다. 그들은 아지트에 찾아가도 여전히 외로울 것임을 잘 안다. 그런데도 매일 밤 그곳을 찾는 까닭은, 그렇게 외로운 사람들이 테이블마다 앉아 있기 때문에. 어차피 외롭기는 마찬가지지만, 혼자만의 공간에서 외로운 것과, 외로운 자들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을 바라보며 외로운 것은 조금은 다르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클럽과 아지트의 치유력을 더 이상 믿지 않지만, 여전히 클럽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책 속의 클럽에서 그들은 따로 돌아앉아 압생트를 마시거나, 둘씩 짝을 지어 뜨개질을 하거나, 여럿이 둥글게 모여 앉아 찰스 램에 관해 독서 토론을 하고,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악마의 그림이 그려진 고서적의 비밀에 대해 수군거린다. 오- 교감의 시절은 찰라이건만 그런 줄 알면서도 찾아가는 보헤미안들.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돕고 싶어하거나, 손에 넣어 사로잡고 싶어하는 그 눈치 빠르고 적절히 친절하며, 손님을 꿰뚫어보는 주인장들과 살롱 마담들이 있는 곳.


밤에 동네 상가 앞을 지나다, 눈동자 없는 퀭한 눈처럼 한곳만 어둡게 불이 꺼져있는 그 공간을 보면 불현듯 환상이 보이는 듯하다. 주변의 시끌벅적한 네온사인과 인파가 갑자기 사라지고, 그 공간에만 조용히 노란 불빛이 들어와 간판에 불이 켜지는 환영. 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이라거나,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거나, 혹은 달콤한 음식 냄새가 스며나오는 스핏파이어 그릴이나 카모메 식당이라거나 그 어떤 간판이라도 좋으리라. 혼자서만 달빛 같이 불을 밝히고 쇼윈도우 안에서 주인이 내다보며 웃는.
아지트를 사랑하는 자여, 그대 이름은 보헤미안이라. 아직도 사람들은 클럽의 판타지를 버리지 못한다. 나 또한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읽는다. 그러나 오늘밤도 역시 아파트 창문 아래로 밤거리를 내다보노라면,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그 공간은 여전히 어둡게 비어있고, 보헤미안은 아무 데도 없다. 카페 소사이어티, 이제는 접어버린, 책 속에서만 만나는, 청춘의 그 오랜 세계시민주의. 클럽이여, 안녕히.


by shadow lamp | 2009/04/05 23:06 | 금빛 책 | 트랙백 | 덧글(3)

트랙백 주소 : http://edou.egloos.com/tb/490429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at 2009/04/08 19:0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hadow lamp at 2009/04/13 20:57
언니의 테디베어 가게, 가 보고 싶어집니다. 저희 올케의 로망이기도 한데, 퀼트 바느질이랑 구체관절인형 만드는 게 취미거든요. 남동생네 갔다가 가끔 선물받아 오기도 해요. 테디베어 가게 한구석에서 비공개님처럼 남의 수다를 한 귀로 들으며 책을 읽어도 참 즐겁겠습니다.
Commented by 소리 at 2009/10/31 17:48
아, 어쩌면 이 책들 대부분 품절인건가요! 그나마 원서로 판매 중인 책은 장바구니에 담았지만, 요즘처럼 마구 무언가 읽어치우고 싶은 같은 날에 쌓아두고 읽고 싶어요. 비록 현실에선 재미없는 문서와 씨름 중이어도...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